“희망은 원래 없었다” – 그럼에도 우리가 희망을 말해야 하는 이유
“희망은 원래 없었다” – 그럼에도 우리가 희망을 말해야 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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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은 원래 없었다” – 그럼에도 우리가 희망을 말해야 하는 이유 |
희망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수많은 걸음이 모이면 결국 길이 생기듯, 희망도 만들어질 수 있다. 루쉰의 문장을 바탕으로, 우리는 어떻게 희망을 마주하고 만들어갈 수 있을까? 철학과 현실, 감정이 교차하는 이야기.
🌱 희망이라는 말이 주는 역설
"희망이란 원래 없었다." 이 문장을 처음 접했을 때, 당신은 어떤 감정을 느꼈는가? 냉소? 체념? 아니면 묘한 안도감?
루쉰은 말했다. 희망은 길과 같다. 원래 없던 것이지만, 사람들이 걸어가면 길이 된다고.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어떤 길 위에 서 있는가? 이 질문은 단순히 시적인 수사가 아니다. 지금 이 순간, 미래가 불투명하고 삶이 무너져내리는 것 같은 현실 속에서 희망이라는 단어는 너무도 부서지기 쉬운 유리처럼 느껴지지 않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우리는 ‘희망’을 말해야 하는가? 그 이유를 차근차근 풀어보려 한다.
1) 희망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
희망은 유전되지 않는다. 누군가는 부유하게 태어나고, 누군가는 가난 속에 태어난다. 하지만 희망은 환경의 산물이 아니다. 희망은 의지의 산물이다.
심리학자 리처드 스나이더는 '희망 이론(Hope Theory)'에서 희망을 이렇게 정의했다.
"희망은 목표를 향해 나아가기 위한 동기와 경로를 상상할 수 있는 능력이다."
즉, 희망은 막연한 낙관이 아니라 전략적인 상상력이다. “언젠간 좋아지겠지”라는 희망은 쉽게 부서진다. 그러나 “나는 어떻게든 길을 찾아갈 것이다”라는 희망은, 아무것도 없는 황무지 위에 처음 길을 내는 첫 걸음과 같다.
2) 희망은 '관계' 속에서 살아난다
혼자 있는 방 안에서, 절망은 더욱 커진다. 고립된 사람에게 희망은 자취를 감춘다.
반대로 희망은 '사람들'과의 연결에서 다시 숨을 쉰다. 정신의학자 요한 하리(Johann Hari)는 말했다.
“우울은 단절의 병이고, 회복은 연결을 통해 온다.”
실제로 사회적 관계가 희망의 수준을 결정한다는 연구도 있다. 2020년 미국 심리학회 발표에 따르면,
"정기적인 대화와 관계를 유지하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희망 점수가 평균 28% 높았다."
당신이 누군가의 희망이 될 수도 있고, 누군가가 당신의 희망이 될 수도 있다.
3)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길을 내는 법
"나는 아무것도 가진 게 없어." "미래도, 계획도, 목표도 보이지 않아."
하지만 그 “없음”은 절망이 아니라 시작점이다. 왜냐하면 ‘무(無)’는 가능성의 다른 말이기 때문이다.
인류의 진보는 늘 희망 없는 순간에 시작되었다.
- 우주비행은 냉전이라는 공포 속에서 시작됐다.
- 독립운동은 국권이 빼앗긴 어둠 속에서 타올랐다.
- 암 치료제는 불치라는 선언 이후 끊임없이 도전한 연구자들 덕분에 탄생했다.
길이란 원래 없었다. 하지만 누군가의 절실한 발걸음이 첫 자국을 남겼고, 뒤따르는 걸음들이 그것을 길로 만들었다.
당신도 누군가에게 첫 걸음이 될 수 있다.
🌅 희망이 '존재하는' 이유
희망은 보이지 않는다. 만질 수도 없다. 하지만 분명히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누군가는 지금 이 순간에도 어두운 방 안에서 자신만의 길을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길은 결국, 다른 이에게 희망이 되어줄 것이다.
당신이 바로 그 ‘첫 발자국’을 남기는 사람일 수 있다.
그러니 이렇게 말해보자. “희망이란 원래 없었다. 그러나 나는 걸어간다.” 그리고 희망은 그때, 생겨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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